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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로스 : 나의 시간은 어디에 맞춰져 있는가

Badack 2021. 3. 7. 23:23

카이로스

왓챠를 통해 카이로스를 보았다. 사람들이 넷플릭스에 공개되면 무조건 세계적인 흥행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라던 웰메이드 드라마, 카이로스. 사람들의 평가가 엄청나게 좋다는 것만 안 채로 주연도, 내용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보았다.

 

1. 타임 패러독스

기본적으로 이 드라마는 시간을 다루는 형태를 띄고있다. 지금의 나와 한 달 후의 너가 하루에 단 한 번 연락할 수 있다는 설정으로부터 모든 드라마의 전개가 이루어진다.

 

이 드라마의 성공 원인중 가장 큰 것이 이 설정이라 생각한다. 여타 다른 창작물들에서 이 능력에 대한 기원을 밝히는 데만 몇 화 이상의 분량을 쓸 것이 뻔한데, 카이로스는 현명하게 그것을 회피해나갔다. 초반 몇 회차가 지나가면 시간을 오가며 통화할 수 있다는 설정은 마치 원래 그런 세계에 있었던 것 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더이상 누구도 저런 전화통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지 궁굼해하지 않게끔 연출해냈다. 

 

시그널 2 언제 돌아옵니까...?

마치 시그널때와도 같다. 스마일 스티커가 붙어있는 무전기를 통해 작 중 인물들은 시간을 넘어 무전을 할 수 있다. 이때 역시 초반 몇 화를 지나면 '어떻게 저 무전기가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은 휴지조각마냥 하늘로 날라가버린다. 어중이떠중이같이 만든 설정이 아니라, 그냥 설정 자체를 자연스럽게 녹여들게 하여 설정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들고 상황에만 집중하게 하는 훌륭한 연출에 박수를 보낸다. 

 

2. 카이로스(Kairos)

제목이었던 카이로스. 카이로스란 단어는 적어도 내가 봤던 기억 안에서는 작중에 대사로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왜 이 드라마의 제목은 카이로스이며 의미는 어떻게 쓰인걸까.

 

잠시 스피드웨건을 등판시켜보자.

그리스 문화에서 시간은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두 개념은 각각의 신에서 따왔다고 한다. 둘 다 시간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세부적인 속성에서의 차이를 보인다. 크로노스는 절대적이고 객관적인 시간이다. 내가 10분, 한 시간, 하루를 보낸다면 내 주변에서도 동일한 만큼의 시간이 진행이 된다. 모두에게 평등하며, 균일한 밀도로 작용하는 시간이 크로노스이다. 카이로스는 상대적이며 주관적인 시간이다. 내가 보내는 10분, 한 시간, 하루가 1살도 안된 내 조카가 보내는 시간과는 질적인 차원이 다를 것이다. 주체인 내가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서 시간이 빨리 갈수도, 느리게 갈 수 도 있는 것이 카이로스이다. 그런 카이로스를 그리스인들은 '기회'라고 부른다.

 

드라마에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발버둥을 조명한다. 죽은 아내와 딸을 살릴 수 있는 기회, 아픈 엄마를 수술할 기회, 하나뿐인 딸의 치료비를 얻어낼 기회 등, 각자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치에 따라 여러 기회와 선택의 순간을 제공한다. 연출진은 그러한 기회 하나하나가 과거와 미래를 오가며 결국 역사를 바꾼다는 것을 보여준다. 때로는 찾아온 기회에 열심히 노력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국은 바뀐다는 것을.

 

3. 나의 시간은 어디에?

어바웃 타임을 보면서는 '나도 저 능력이 있었으면 어떻게 썼을까?'라고 고민했던 것과는 달리, 크로노스를 보면서는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미래로부터 로또 2등 당첨번호를 미리 알게되는 것 이외에는 크게 내 인생에 있어서 득 될 것이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있어서였을까.

 

다만 나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가를 계속 물어보게 된다. 작중 검은 속내를 가진 인물들이 년 단위의 프로젝트를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하지만 이런 것들은 주인공들의 '카이로스'를 통해서 저지된다. 저어어엉말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이 드라마는 크로노스를 멈춰세울 수 있는 카이로스가 주인공인 셈이다.

 

크로노스는 수평적인 시간임에 반면, 카이로스는 수직적인 시간이라고 배웠다. 내가 어떻게 집중하느냐에 따라서 크로노스는 카이로스로 바뀔  수 있다. 남들이 흘려보내는 시간이 나에게는 선택의 순간이 될 수 있고 하나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제발, 시간을 흘려보내지만은 말자.

 

 

 

격리시설에 들어온지 벌써 6일이나 지났다. 마음이 많이 힘든 기간인데, 적당한 드라마를 통해서 잘 빌드업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남은 기간동안 더 집중해서 시간을 내 것으로 만들어야겠다.

 

아. 남규리는 아무리봐도 사악해보인다. 그만큼 연기가 훌륭하다는 뜻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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