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home sweet home/life

#2 코로나 확진 둘째 날. 엄크

어제 했던 걱정이 현실이 되었다. 룸메이트는 내 예상보다 훨씬 크고 지속적으로 코골이를 했으며 심지어 잠꼬대(블랙러시안에 우유를 더 넣어야 한다고 말했다!!!)까지 밤새도록 해댔다. 덕분에 쪽잠만 계속 자다가 7시쯤 밥 먹으라는 방송에 그냥 일어나기로 결심했다. 의료진에게 카톡을 보내어 혹시 방을 바꿔주거나 귀마개를 줄 수 있냐고 물어보았는데 규정상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아, 목이 많이 붓고 코도 막히기 시작했다고 카톡으로 보고했더니 점심이 배달될 때 약도 같이 보내준다고 한다. 

 

둘째날 아침식사

식사는 어제보다 더 부실했다. 국 빼고는 거의 못 먹을 수준이었다. 귤이라도 먹어서 상큼하게 시작해볼까 싶었지만 한 개는 곰팡이가 피었고 나머지는 물러있었다. 아무래도 대량 보관을 하다 보니 귤 특성상 금방 상해버린 게 아닐까 싶다. 그래도 이렇게나마 챙겨주는 것에 감사해야지 싶으면서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 아직 검사 결과를 대기 중인 친구들에게는 아침식사 사진을 보내서 '너네 양성이면 나랑 같이 이거 먹을 거임ㅋㅋㅋ 존맛탱'이라고 도발하는 패기도 보여줬다.  

 

어제 보니 대부분 검사 결과는 아침 9시 반 정도에 문자로 오는 듯했다. 나와 같이 칵테일바를 갔던 친구 두 명은 9시가 지나도 연락이 오지 않자 직접 보건소로 전화를 걸어서 본인들이 음성임을 확인했다. 가장 걱정했던 여자친구 역시 음성. 아빠도 음성으로 나왔지만 문제는 엄마였다. 엄마는 코로나 양성 판정을 받았다.

 

기억을 거슬러올라가보니 엄마랑 이야기하면서 밥을 먹었던 적이 있다. 지난주 금요일, 열이 막 나기 시작한 그 날, 너무 힘든 근무의 끝에 BBQ 황금올리브를 주문했었다. 마침 네고왕 이벤트도 하고 있길래 치킨텐더까지 거하게 시켜서 엄마랑 둘이서 옴뇸뇸 나눠먹었는데. 아마 그 날 엄마에게도 감염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 날 이후부터는 혹시 몰라서 스스로 격리 태세에 들어갔기에, 비말이 튀지 않았을 것이다 싶다. 내가 만약 밥을 먹고 들어왔다면 엄마는 음성이었을까? 어디서부터 후회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BBQ 황금올리브를 후회한다고 말하기엔 내 올곧은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황금올리브는 사랑이거든.

 

친절한 의료진과 졸려 죽겠는 코로나 환자

그렇게 엄마도 시설 격리를 준비하게 됐다. 다행히 의료진의 센스 덕분에 나는 엄마와 방을 같이 쓸 수 있도록 배정되었다. 의료진 피셜로는 '중간에 방을 옮기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며 '지금 방에 있으면 숙면이 어려울 것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무엇보다 엄마랑 같이 있으면 나도 엄마도 마음이라도 편하게 있지 않을까 싶었다. 이전 룸메이트가 불편한 건 덤이고.

 

10시~11시 사이에 방을 옮길 테니 준비하라는 연락이 왔다. 기존에 쓰던 침구류와 기타 물품들 모두 챙겨가야 하다 보니 이것저것 준비할게 많았다. 10시 반 정도 되니 방호복을 입은 사람들이 복도를 소독하면서 나를 이송해갔다. 기존에 머물던 7층에서 10층으로 올라왔더니 복도부터 한산하다. 기존의 7층은 택배 상자들(필요한 물건들은 택배를 통해 받는다)과 사용한 쓰레기통 같은 걸로 꽉꽉 채워져 있었다만 여기는 아무것도 없다. 아직 아무도 들어오지 않았나 보다.

 

여자 친구와 짧은 크아를 했다. 여자 친구가 유일하게 하는 게임이 크아여서 같이 했는데 생각보다 여기 와이파이가 좋지 않아서인지 계속 물풍선을 잘못 놓는다. 아무튼 내 실력 아님.

몇 판 하다 보니 금방 흥미가 떨어져서 (절대 못 깨서가 아니다) 게임을 종료했다. 그래도 자가 격리하면서 통화도 하고 게임도 하고 이렇게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해해야겠구나 싶었다. 여기가 부실한 와이파이와 덜 편한 침대를 제외하면 우리 집에서 자가 격리하는 것보다 훨씬 쾌적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생각해보니 나는 넥슨류 게임을 잘해 본적이 거의 없다. 메이플도 늘 쪼랩이었고 바람의 나라에서는 그 흔하다는 만랩도 못 찍어봤다. 낼모레 서른이 다 되어가는데 드리프트도 잘 못한다. 뭐 크아를 못하는 것도 어찌 보면 기정사실이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게임을 해주는 당신에게 늘 감사한 생각이 든다. 그래도 할리갈리는 내가 최★고☆존★엄 이니깐 괜찮아.

 

엄마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샤워도 하고 하루치 빨래도 미리 다 해놓았다. 오전에도 한 번 청소하긴 했지만 바닥에 먼지가 좀 있는 것 같아 한 번 더 청소를 했다. 

2시쯤, 엄마가 오셨다. 오늘따라 더 수척해 보이시는 것은 기분 탓일까. 미리 청소도 다 해놓고 공용 비품도 다 배치해놔서 후딱 엄마의 언박싱을 도와드릴 수 있었다. 체온과 혈압, 산소포화도를 재는 방법을 알려드리니 긴장이 풀렸는지 잠이 왔다. 혈육의 안정감이란 무시 못하는구나 또 한 번 느끼면서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

 

다고 생각했다. 4시 반이 되자 칼같이 의료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친절하게 '주무시고 계셨나봐요' 라고 깨워주며 오후 4시에 보내줘야 하는 자가검진을 누락했으니 빨리 보내달라는 우리의 갓갓의료진. 물론 엄청나게 달콤한 낮잠이었다만, 내가 어떻게 화를 낼 수 있겠는가. 리마인더 역할까지 해주시는데 그저 죄송할 뿐.

 

저녁으로는 TGI 도시락이 나왔다. 멸종된 줄 알았던 TGI를 격리하면서 볼 줄은 몰랐다. 점심에는 세븐일레븐 비빔밥 도시락을 먹었었는데 아무래도 롯데그룹 쪽에서 도네이션이 들어온 게 아닐까 생각이 된다. 평소 같았으면 화장실 청소하는데나 썼을 펩시콜라 뚱캔이 하나 들어있었는데 이게 왜 그렇게 맛있게 느껴지는지. 베트남에 봉사활동하러 갔을 때 마셨던 콜라 이후에 이렇게 맛있게 먹은 적이 있었나. 미안하다 펩시야. 그래도 형이 코카콜라 주식은 안 사도 펩시 주식은 샀었잖아.

 

 

몸이 안 좋아졌다 좋아졌다를 반복한다. 다행히 격리시설로 옮긴 이후에는 열이 나진 않는다. 다만 어지러움과 인후통이 심하게 생겨서 아직까지 공부를 할 컨디션은 아닌 듯싶다. 일단 영어 공부나 영상 공부는 뒷전으로 하고 뭔가 이 곳에서의 재미를 찾기 위해서 알바몬을 뒤졌다. 타이핑 알바나 간단한 그래픽 알바가 있으면 지원해보려고 하는데 온통 블로그, 인스타 마케팅뿐이다. 10개쯤 탭을 넘겨서 겨우 찾은 게임 스크립트 짜는 알바가 있어서 일단 지원. 이거라도 되면 그래도 시간 잘 가지 않을까 싶다. 근데 사실 큰 기대는 안 한다. 레이블러에 새로운 프로젝트나 올라오길 기대해야지.

 

오늘 하고자 했던 일 중에서는 격리 통지서 발급건이 딜레이 되고 있다. 동작보건소에서 나에게 발급해주는 통지서인데, 회사에서 빨리 줄 수 있냐고 그래서 의료진에게 요청을 해놓았다. 아직까지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만, 어떻게 내가 재촉할 수 있겠나 싶다. 그냥 회사에서 연락이 오면 그때서야 한 번 더 전화해봐야지. 

의료진이랑 전화 또는 카톡으로 커뮤니케이션하는 방식이 꽤나 신기하다. 기존의 의료체계에서 왜 이런 방법을 쓰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합리적이기도 하고 효과적이기도 한 것 같다. 기술들은 위기를 통해서 발전한다고 하는데, 아마 이번 코로나는 2차 세계대전의 과학 발전만큼 급진적인 기술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게 아닐까 싶다.

 

오늘은 어제 잠도 못 잤을뿐더러 긴장이 풀려서인지 자꾸 졸음이 온다. 아까 낮에 좀 잤음에도 불구하고 슬슬 또 잠이 온다. 내일은 좀 흥미 있을만한 일을 찾아야 할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아빠 말처럼 미니기타 하나라도 들고 올걸 그랬나?

반응형